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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스테파노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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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테파노 3세는 768년 교황으로 선출된 인물이다. 그는 대립 교황 콘스탄티노 2세와의 갈등, 랑고바르드 왕국과의 관계, 769년 라테란 공의회 개최 등 복잡한 정치적 상황 속에서 교황직을 수행했다. 스테파노 3세는 프랑크 왕국과의 동맹을 모색했으나 랑고바르드 왕국의 압력에 굴복하기도 했으며, 측근들의 몰락과 잔혹한 보복으로 얼룩진 시기를 겪었다. 그는 772년 2월 1일에 사망했으며, 사후 시칠리아에서 성인으로 추앙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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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스테파노 3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교황 스테파노 3세
이름스테파노 3세
출생 이름스테파누스
재임 기간
즉위768년 8월 7일
퇴위772년 1월 24일
이전 교황바오로 1세
다음 교황하드리아노 1세
개인 정보
출생720년경
출생지동로마 제국, 시칠리아
사망772년 1월 24일
사망지교황령, 로마
기타 정보
직함로마 주교
교회가톨릭 교회

2. 생애 초기와 교황 선출

스테파노 3세는 720년 시칠리아에서 태어나, 교황 그레고리오 3세 재임기에 로마로 와 성 크리소고노 수도원의 베네딕도회 수사가 되었다.[46][47] 교황 자카리아에 의해 사제로 서품된 후 라테라노 궁전에서 교황을 보좌하며, 여러 교황을 거치면서 교회 내에서 높은 지위와 강력한 파벌을 형성하였다.[46] 767년 교황 바오로 1세 임종 후 강력한 교황 후보로 부상하였다.[46]

그러나, 네피의 토토 공작이 동생 대립교황 콘스탄티노 2세를 교황으로 내세우면서 상황이 복잡해졌다.[46] 당시 평신도였던 콘스탄티노 2세는 편법으로 주교가 되었다. 이에 로마 교회의 공증인이었던 크리스토포로[48]와 그의 아들이자 로마 교회에서 회계를 담당했던 세르지오는 랑고바르드 왕국의 데시데리우스 왕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데시데리우스 왕은 군대를 지원하여 콘스탄티노 2세를 축출했다. 랑고바르드군은 필립보를 교황으로 내세웠으나, 크리스토포로에 의해 무효화되었다.

768년 8월 1일, 크리스토포로는 성 하드리아노 성당 앞에 로마 교회의 성직자, 군인, 시민들을 소집하여 스테파노 3세를 정당한 교황으로 선출했다.[49] 사람들은 산타 체칠리아 인 트라스테베레 성당에 있던 스테파노를 라테라노 궁전까지 호위하였다.[49]

스테파노 3세의 지지자들은 대립교황 콘스탄티노 2세와 그 지지자들에게 잔혹한 보복을 가했다.[50] 콘스탄티노 2세는 쇠사슬에 묶여 로마 시내를 끌려다녔고,[50] 그의 주교 대리 테오도로는 눈알이 뽑히고 혀가 잘렸으며, 동생 파시부스도 눈알이 뽑혔다.[50] 768년 8월 6일 콘스탄티노 2세는 공식 폐위되었고, 스테파노 3세는 다음 날인 8월 7일 주교 서품을 받고 교황좌에 착좌하였다.

스테파노 3세 착좌 이후에도 혼란은 계속되었다. 알라트리에서 반란이 일어났으나 진압되었고, 주동자들은 눈알이 뽑히고 혀가 잘리는 형벌을 받았다.[51] 교황의 공문서 기록 보관인 그라티오수스의 지시로 콘스탄티노 2세는 눈알이 뽑히고 수도원에 유폐되었다.[52] 필립보를 대립교황으로 세우려던 왈디페르트 신부는 반역 혐의로 체포되어 눈알이 뽑힌 후 사망하였다.[53][54]

이러한 잔혹 행위에 대한 스테파노 3세의 역할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호러스 맨은 스테파노 3세가 신앙심은 깊었으나 유약하여 실질적인 통솔력이 없었다고 주장한다.[50] 반면, 루이 마리 드코르맹은 스테파노 3세가 모든 일을 지시하고 즐겼다고 주장한다.[52] 역사학자 페르디난트 그레고로비우스는 중간 입장을 취했는데, 스테파노 3세가 만약 잔학 행위를 사주하거나 명령하지 않았을지라도, 자기 이익이나 그의 약한 지위 때문에 그것을 막으려 하지도 않았다고 언급했다.[55]

분명한 것은 교황령 성립으로 인해 로마 귀족 가문들이 교황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살인까지 감행하는 모습을 보였다는 것이다.[56]

2. 1. 대립교황과의 갈등, 그리고 잔혹한 보복

스테파노 3세는 720년 시칠리아에서 태어나, 교황 그레고리오 3세 재임기에 로마로 와 성 크리소고노 수도원의 베네딕도회 수사가 되었다.[46][47] 교황 자카리아에 의해 사제로 서품된 후 라테라노 궁전에서 교황을 보좌하며, 여러 교황을 거치면서 교회 내에서 높은 지위와 강력한 파벌을 형성하였다.[46] 767년 교황 바오로 1세 임종 후 강력한 교황 후보로 부상하였다.[46]

그러나, 네피의 토토 공작이 동생 대립교황 콘스탄티노 2세를 교황으로 내세우면서 상황이 복잡해졌다.[46] 당시 평신도였던 콘스탄티노 2세는 편법으로 주교가 되었다. 이에 크리스토포로[48]와 그의 아들 세르지오는 랑고바르드 왕국의 데시데리우스 왕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데시데리우스 왕은 군대를 지원하여 콘스탄티노 2세를 축출했다. 랑고바르드군은 필립보를 교황으로 내세웠으나, 크리스토포로에 의해 무효화되었다.

768년 8월 1일, 크리스토포로는 성 하드리아노 성당 앞에 로마 교회의 성직자, 군인, 시민들을 소집하여 스테파노 3세를 정당한 교황으로 선출했다.[49] 사람들은 산타 체칠리아 인 트라스테베레 성당에 있던 스테파노를 라테라노 궁전까지 호위하였다.[49]

스테파노 3세의 지지자들은 대립교황 콘스탄티노 2세와 그 지지자들에게 잔혹한 보복을 가했다.[50] 콘스탄티노 2세는 쇠사슬에 묶여 로마 시내를 끌려다녔고,[50] 그의 주교 대리 테오도로는 눈알이 뽑히고 혀가 잘렸으며, 동생 파시부스도 눈알이 뽑혔다.[50] 768년 8월 6일 콘스탄티노 2세는 공식 폐위되었고, 스테파노 3세는 다음 날인 8월 7일 주교 서품을 받고 교황좌에 착좌하였다.

스테파노 3세 착좌 이후에도 혼란은 계속되었다. 알라트리에서 반란이 일어났으나 진압되었고, 주동자들은 눈알이 뽑히고 혀가 잘리는 형벌을 받았다.[51] 교황의 공문서 기록 보관인 그라티오수스의 지시로 콘스탄티노 2세는 눈알이 뽑히고 수도원에 유폐되었다.[52] 필립보를 대립교황으로 세우려던 왈디페르트 신부는 반역 혐의로 체포되어 눈알이 뽑힌 후 사망하였다.[53][54]

이러한 잔혹 행위에 대한 스테파노 3세의 역할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호러스 맨은 스테파노 3세가 신앙심은 깊었으나 유약하여 실질적인 통솔력이 없었다고 주장한다.[50] 반면, 루이 마리 드코르맹은 스테파노 3세가 모든 일을 지시하고 즐겼다고 주장한다.[52] 페르디난트 그레고로비우스는 스테파노 3세가 잔혹 행위를 부추기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약한 권력 때문에 막지도 못했다고 평가한다.[55]

분명한 것은 교황령 성립으로 인해 로마 귀족 가문들이 교황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살인까지 감행하는 모습을 보였다는 것이다.[56]

3. 재임 기간의 주요 사건

시칠리아 출신으로 사제였다. 전임 교황 파울루스 1세는 우유부단한 성격이었기에 교황청 내 많은 당파가 생겨났고, 대립교황인 콘스탄티누스 2세와 필리푸스와 교황 자리를 놓고 대립하다가, 768년 8월 7일에 정식으로 교황으로 취임했다. 그러나 교황 취임 후에는 랑고바르드 왕국의 침략에 시달렸고, 결국 그 압력에 굴복하여 프랑크 왕국과의 우호 관계를 끊는 실책을 범했다(프랑크 왕에는 카롤루스 대제가 즉위해 있었다). 772년 1월 24일, 재위 3년 5개월 17일 만에 사망했다.

==== 프랑크 왕국, 랑고바르드 왕국과의 관계 ====

스테파노 3세는 교황으로 재임하는 동안 랑고바르드 왕국의 세력 확장을 우려하여 프랑크 왕국에 희망을 걸었다.[57][21] 그는 카롤루스와 카를로만 형제 사이의 분쟁을 중재하려 했으나, 이는 오히려 랑고바르드 왕국에게 이탈리아에서 명분을 주는 결과를 초래했다.[58][22] 769년 스테파노 3세는 두 형제를 화해시키고, 그들의 아버지 피핀이 교황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던 사실을 상기시키며 교황령을 지원하도록 압박했다.[59][23] 동시에 랑고바르드 왕국과도 회담을 진행하여 프랑크 왕국에게 중재를 요청했다.[59][23]

770년, 교황과 프랑크 왕국은 랑고바르드 왕국에 사절단을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사절단에는 카롤루스의 모친 랑의 베르트라다 태후도 포함되었다.[59][23] 프랑크 사절단의 중재로 스테파노 3세는 베네벤토의 일부 지역을 교황령으로 되찾는 성과를 얻었다.[59][23] 그러나 스테파노 3세는 데시데리우스의 딸 데시데라타와 베르트라다 태후의 아들 중 한 명과의 혼담 가능성이 타전되자 경악했다.[60][24] 카롤루스의 딸과 데시데리우스의 아들 사이에 혼담이 오갔다는 추측도 있다.[25]

이에 스테파노 3세는 카롤루스와 카를로만에게 서신을 보내 프랑크 왕국과 랑고바르드 왕국 간의 동맹에 이의를 제기하며, 과거 교황의 적들을 자신들의 적으로 간주하고 랑고바르드 왕국에 맞서 교회의 권리를 되찾아 주겠다고 성 베드로에게 맹세했던 사실을 상기시켰다.[61][27] 그는 "하나님의 뜻과 아버지의 명령에 따라 이미 자신의 국가의 귀족 부인과 합법적으로 결혼하여 소중히 여겨야 할 여러분. 그리고 분명히 여러분은 아내를 버리고 다른 사람과 결혼하거나 조상 중 누구도 한 적이 없는 외국인과 결혼 동맹을 맺는 것은 불법입니다.... 이미 결혼한 상태에서 다시 결혼하려는 생각을 품는 것조차 사악합니다."라고 하였다.[28]

그러나 스테파노 3세의 호소는 무시되었고, 770년 카롤루스는 데시데라타와 혼인하여 랑고바르드 왕국과의 혼인 동맹을 일시적으로 공고하게 하였다.[62][29]

==== 769년 라테란 공의회 ====

콘스탄티누스 2세의 지지자들이 대부분 처리되자, 스테파노 3세는 프랑크 왕국 왕 피핀 3세에게 서신을 보내 자신의 선출을 알리고, 최근의 혼란을 논의하기 위해 열고자 하는 공의회에 참여할 주교들을 요청했다. 피핀 3세가 사망했기에, 샤를마뉴와 카를로만이 열두 명의 주교를 769년 라테란 공의회에 파견하기로 동의했다.[17]

이 공의회에서는 콘스탄티누스 2세를 최종적으로 단죄했는데, 그는 구타를 당하고 혀가 잘린 채 수도원 감방으로 보내졌다. 콘스탄티누스 2세가 임명한 모든 성직자들은 무효로 선언되었다. 또한 교황 선거에 대한 엄격한 규칙을 제정하여 그 이후 선거에서 귀족들의 참여를 제한했다. 마지막으로, 히에리아 공의회의 결정은 거부되었고, 성상에 대한 숭배 관행이 확정되었다(성상 파괴 운동 참조).[18]

770년에는 평신도인 미카엘을 라벤나 대주교로 선출한 것을 승인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으나, 스테파노 3세는 이를 거부했다. 미카엘은 롬바르드 왕 데시데리우스리미니 공작과 결탁하여 먼저 선출된 레오 1세를 감금한 상태였다.[19] 스테파노 3세는 라테란 공의회의 규약을 인용하며 미카엘에게 물러날 것을 요구하는 서신과 사절을 보냈으나, 미카엘은 이를 거부했다.[20] 1년 이상 대립이 계속되다가, 프랑크 대사가 교황 특사와 함께 라벤나에 도착하자 미카엘의 반대자들이 그를 전복시키고 사슬에 묶어 로마로 보냈다. 레오 1세도 곧 뒤따랐고, 스테파노 3세는 그를 대주교로 성성했다.[20]

==== 크리스토포로와 세르지오의 몰락 ====

769년부터 770년까지 교황 스테파노 3세는 자신을 교황좌에 앉히게 도와준 수석 서기관 크리스토포로와 그의 아들 세르지오의 지지와 조언에 줄곧 의지하며 지냈다.[63][64][30][31] 두 사람은 랑고바르드 왕국을 멀리하고 프랑크 왕국과의 관계를 중시하였는데, 이는 결과적으로 랑고바르드 왕 데시데리우스의 반발을 사서 결국 자신들의 몰락을 초래하였다.[63][64][30][31] 데시데리우스는 교황의 시종 파울루스 아피아르타를 비롯한 로마 교회에서 일하는 여러 직원을 매수하여 크리스토포로와 세르지오에 대한 좋지 않은 소문을 퍼뜨렸다.[63][30]

771년 데시데리우스는 성 베드로의 무덤을 참배한다는 명목으로 군대를 이끌고 로마를 침공하였다.[32] 이에 크리스토포로와 세르지오는 로마 시의 모든 성문을 닫고 공성전에 대비하였다. 로마 성벽에 당도한 데시데리우스는 스테파노 3세에게 회담을 요청하였다. 스테파노 3세는 그의 요청에 응하여 성문을 열고 데시데리우스를 맞으러 나갔는데, 그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파울루스 아피아르타는 시민들을 선동하여 크리스토포로와 세르지오를 전복시키려고 하였다. 그러나 크리스토포로와 세르지오의 반격이 만만치 않자, 파울루스 아피아르타와 그의 동료들은 라테라노 궁전으로 급히 피신하였다.[65][32]

바로 이 때, 스테파노 3세가 라테라노 궁전으로 돌아와서 크리스토포로와 그의 지지자들의 추적을 피해 숨은 파울루스 아피아르타와 그를 따르는 무리와 맞닥뜨리게 되었다.[66][33] 스테파노 3세가 무사히 돌아온 것을 보고, 그가 데시데리우스와 모종의 밀약을 맺은 것은 아닐까 하고 의심한 크리스토포로는 스테파노 3세에게 가서 자신과 자신의 아들을 랑고바르드 군대에 넘기지 않겠다는 맹세를 할 것을 요구했다. 이에 스테파노 3세는 크게 진노하여 크리스토포로를 질책하면서 파울루스 아피아르타를 괴롭히지 말고 당장 물러날 것을 명령하였고, 크리스토포로는 순순히 이를 따랐다.[66][33]

스테파노 3세는 데시데리우스 왕의 보호를 받기 위해 성 베드로 대성전으로 황급히 피신하였다.[67][34] 데시데리우스는 자신을 찾아온 스테파노 3세를 성 베드로 대성전의 객실에 가두고 자신의 보호를 받으려면 크리스토포로와 세르지오를 자신에게 넘기라고 요구하였다.[67][35] 이에 스테파노 3세는 두 명의 주교를 크리스토포로와 세르지오에게 보내 수도원에 들어가거나 성 베드로 대성전에 있는 자신을 알현하러 나오거나 양자택일을 하라고 전하였다. 그 시각에 데시데리우스는 로마 시민들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말을 널리 퍼뜨려 선동하였다.

“스테파노 교황님께서는 여러분에게 여러분의 형제들과 싸우지 말고, 크리스토포로를 도시에서 추방함으로써 여러분 자신과 여러분의 자녀들을 구하라고 지시하셨습니다.”[68][36]


데시데리우스의 선동은 그가 기대한 만큼의 효과를 냈다. 크리스토포로와 세르지오를 따르는 무리 내부에 내분이 일어난 것이다. 크리스토포로와 세르지오는 자신들을 따르는 동료들을 의심하기 시작했으며, 동료들 역시 크리스토포로와 세르지오를 차례대로 떠나기 시작했다. 크리스토포로와 세르지오는 둘 다 로마를 주저하다가 결국 한밤중에 스테파노 3세를 찾아갔다.[69][37] 그리고 다음날 크리스토포로와 세르지오는 랑고바르드 군대에게 신병이 인도되었다. 스테파노 3세는 크리스토포로와 세르지오의 석방을 위해 협상을 벌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파울루스 아피아르타와 그의 추종자들은 데시데리우스와 정세를 논한 다음에 크리스토포로와 세르지오의 안구를 모두 적출하였다. 크리스토포로는 3일 후에 후유증을 이기지 못하여 사망했으며, 세르지오는 라테라노 궁전에 딸린 독방에 감금되었다.[69][37]

데시데리우스는 카롤루스가 개입할 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스테파노 3세로 하여금 크리스토포로와 세르지오가 카롤루스의 형제인 카를로만의 특사와 함께 자신을 시해하려는 음모를 꾸몄다는 내용의 편지를 써서 카롤루스에게 보낼 것을 강요하였다.[70][38] 아울러 스테파노 3세는 스스로 데시데리우스에게 가서 보호를 요청하였으며, 크리스토포로와 세르지오는 스테파노 3세나 데시데리우스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스스로 그들 앞에 나타났고, 스테파노 3세가 그들의 구명을 위해 노력하던 사이에 그의 지시 없이 한 무리의 장정이 나타나 크리스토포로와 세르지오를 잡아 두 눈을 뽑아버렸다고 적을 것을 강요하였다.[39]

스테파노 3세가 데시데리우스에게 성 베드로의 시신 앞에서 했던 약속을 이행해 달라고 요청했을 때, 롬바르드 왕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너를 다스리던 크리스토포루스와 세르기우스를 네 길에서 제거해 준 것에 만족하고 권리를 요구하지 마라. 게다가, 내가 너를 계속 돕지 않으면 큰 문제가 너에게 닥칠 것이다. 왜냐하면 프랑크족의 왕 카를로만은 크리스토포루스와 세르기우스의 친구이고, 로마에 와서 너를 붙잡고 싶어할 것이기 때문이다."[40]

==== 끊임없는 사건과 교황의 죽음 ====

771년 데시데리우스는 이스트리아의 주교들을 설득하여 그라도 총대주교를 배척하고 랑고바르드 왕국의 통제를 받고 있던 아퀼레이아 총대주교의 사목 아래 들어가도록 하였다.[71] 스테파노 3세는 즉시 반항적인 주교들의 성무 집행을 정지시키고, 그들에게 다시 그라도 총대주교에게 순명하지 않을 경우에는 파문에 처하겠다는 경고를 담은 서신을 써서 보냈다.[71]

크리스토포루스가 몰락한 이후, 파울루스 아피아르타는 로마 교회 내에서 계속 고위직으로 남아 있었다.[72] 772년 초, 스테파노 3세가 병상에 눕자 아피아르타는 로마의 유력한 귀족들과 고위 성직자들을 로마에서 추방하였다.[73] 1월 24일, 스테파노 3세가 선종하기 8일 전, 아피아르타는 세르지오를 목졸라 죽이도록 지시하였다.[71]

스테파노 3세는 772년 2월 1일에 선종하였으며,[74] 그의 뒤를 이어 교황 하드리아노 1세가 선출되었다.

3. 1. 프랑크 왕국, 랑고바르드 왕국과의 관계

스테파노 3세는 교황으로 재임하는 동안 랑고바르드 왕국의 세력 확장을 우려하여 프랑크 왕국에 희망을 걸었다.[57][21] 그는 카롤루스와 카를로만 형제 사이의 분쟁을 중재하려 했으나, 이는 오히려 랑고바르드 왕국에게 이탈리아에서 명분을 주는 결과를 초래했다.[58][22] 769년 스테파노 3세는 두 형제를 화해시키고, 그들의 아버지 피핀이 교황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던 사실을 상기시키며 교황령을 지원하도록 압박했다.[59][23] 동시에 랑고바르드 왕국과도 회담을 진행하여 프랑크 왕국에게 중재를 요청했다.[59][23]

770년, 교황과 프랑크 왕국은 랑고바르드 왕국에 사절단을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사절단에는 카롤루스의 모친 랑의 베르트라다 태후도 포함되었다.[59][23] 프랑크 사절단의 중재로 스테파노 3세는 베네벤토의 일부 지역을 교황령으로 되찾는 성과를 얻었다.[59][23] 그러나 스테파노 3세는 데시데리우스의 딸 데시데라타와 베르트라다 태후의 아들 중 한 명과의 혼담 가능성이 타전되자 경악했다.[60][24] 카롤루스의 딸과 데시데리우스의 아들 사이에 혼담이 오갔다는 추측도 있다.[25]

이에 스테파노 3세는 카롤루스와 카를로만에게 서신을 보내 프랑크 왕국과 랑고바르드 왕국 간의 동맹에 이의를 제기하며, 과거 교황의 적들을 자신들의 적으로 간주하고 랑고바르드 왕국에 맞서 교회의 권리를 되찾아 주겠다고 성 베드로에게 맹세했던 사실을 상기시켰다.[61][27] 그는 "하나님의 뜻과 아버지의 명령에 따라 이미 자신의 국가의 귀족 부인과 합법적으로 결혼하여 소중히 여겨야 할 여러분. 그리고 분명히 여러분은 아내를 버리고 다른 사람과 결혼하거나 조상 중 누구도 한 적이 없는 외국인과 결혼 동맹을 맺는 것은 불법입니다.... 이미 결혼한 상태에서 다시 결혼하려는 생각을 품는 것조차 사악합니다."라고 하였다.[28]

그러나 스테파노 3세의 호소는 무시되었고, 770년 카롤루스는 데시데라타와 혼인하여 랑고바르드 왕국과의 혼인 동맹을 일시적으로 공고하게 하였다.[62][29]

3. 2. 769년 라테란 공의회

콘스탄티누스 2세의 지지자들이 대부분 처리되자, 스테파노 3세는 프랑크 왕국 왕 피핀 3세에게 서신을 보내 자신의 선출을 알리고, 최근의 혼란을 논의하기 위해 열고자 하는 공의회에 참여할 주교들을 요청했다. 피핀 3세가 사망했기에, 샤를마뉴와 카를로만 1세가 열두 명의 주교를 769년 라테란 공의회에 파견하기로 동의했다.[17]

이 공의회에서는 콘스탄티누스 2세를 최종적으로 단죄했는데, 그는 구타를 당하고 혀가 잘린 채 수도원 감방으로 보내졌다. 콘스탄티누스 2세가 임명한 모든 성직자들은 무효로 선언되었다. 또한 교황 선거에 대한 엄격한 규칙을 제정하여 그 이후 선거에서 귀족들의 참여를 제한했다. 마지막으로, 히에리아 공의회의 결정은 거부되었고, 성상에 대한 숭배 관행이 확정되었다(성상 파괴 운동 참조).[18]

770년에는 평신도인 미카엘을 라벤나 대주교로 선출한 것을 승인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으나, 스테파노 3세는 이를 거부했다. 미카엘은 롬바르드 왕 데시데리우스리미니 공작과 결탁하여 먼저 선출된 레오 1세를 감금한 상태였다.[19] 스테파노 3세는 라테란 공의회의 규약을 인용하며 미카엘에게 물러날 것을 요구하는 서신과 사절을 보냈으나, 미카엘은 이를 거부했다.[20] 1년 이상 대립이 계속되다가, 프랑크 대사가 교황 특사와 함께 라벤나에 도착하자 미카엘의 반대자들이 그를 전복시키고 사슬에 묶어 로마로 보냈다. 레오 1세도 곧 뒤따랐고, 스테파노 3세는 그를 대주교로 성성했다.[20]

3. 3. 크리스토포로와 세르지오의 몰락

769년부터 770년까지 교황 스테파노 3세는 자신을 교황좌에 앉히게 도와준 수석 서기관 크리스토포로와 그의 아들 세르지오의 지지와 조언에 줄곧 의지하며 지냈다.[63][64][30][31] 두 사람은 랑고바르드 왕국을 멀리하고 프랑크 왕국과의 관계를 중시하였는데, 이는 결과적으로 랑고바르드 왕 데시데리우스의 반발을 사서 결국 자신들의 몰락을 초래하였다.[63][64][30][31] 데시데리우스는 교황의 시종 파울루스 아피아르타를 비롯한 로마 교회에서 일하는 여러 직원을 매수하여 크리스토포로와 세르지오에 대한 좋지 않은 소문을 퍼뜨렸다.[63][30]

771년 데시데리우스는 성 베드로의 무덤을 참배한다는 명목으로 군대를 이끌고 로마를 침공하였다.[32] 이에 크리스토포로와 세르지오는 로마 시의 모든 성문을 닫고 공성전에 대비하였다. 로마 성벽에 당도한 데시데리우스는 스테파노 3세에게 회담을 요청하였다. 스테파노 3세는 그의 요청에 응하여 성문을 열고 데시데리우스를 맞으러 나갔는데, 그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파울루스 아피아르타는 시민들을 선동하여 크리스토포로와 세르지오를 전복시키려고 하였다. 그러나 크리스토포로와 세르지오의 반격이 만만치 않자, 파울루스 아피아르타와 그의 동료들은 라테라노 궁전으로 급히 피신하였다.[65][32]

바로 이 때, 스테파노 3세가 라테라노 궁전으로 돌아와서 크리스토포로와 그의 지지자들의 추적을 피해 숨은 파울루스 아피아르타와 그를 따르는 무리와 맞닥뜨리게 되었다.[66][33] 스테파노 3세가 무사히 돌아온 것을 보고, 그가 데시데리우스와 모종의 밀약을 맺은 것은 아닐까 하고 의심한 크리스토포로는 스테파노 3세에게 가서 자신과 자신의 아들을 랑고바르드 군대에 넘기지 않겠다는 맹세를 할 것을 요구했다. 이에 스테파노 3세는 크게 진노하여 크리스토포로를 질책하면서 파울루스 아피아르타를 괴롭히지 말고 당장 물러날 것을 명령하였고, 크리스토포로는 순순히 이를 따랐다.[66][33]

스테파노 3세는 데시데리우스 왕의 보호를 받기 위해 성 베드로 대성전으로 황급히 피신하였다.[67][34] 데시데리우스는 자신을 찾아온 스테파노 3세를 성 베드로 대성전의 객실에 가두고 자신의 보호를 받으려면 크리스토포로와 세르지오를 자신에게 넘기라고 요구하였다.[67][35] 이에 스테파노 3세는 두 명의 주교를 크리스토포로와 세르지오에게 보내 수도원에 들어가거나 성 베드로 대성전에 있는 자신을 알현하러 나오거나 양자택일을 하라고 전하였다. 그 시각에 데시데리우스는 로마 시민들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말을 널리 퍼뜨려 선동하였다.

“스테파노 교황님께서는 여러분에게 여러분의 형제들과 싸우지 말고, 크리스토포로를 도시에서 추방함으로써 여러분 자신과 여러분의 자녀들을 구하라고 지시하셨습니다.”[68][36]


데시데리우스의 선동은 그가 기대한 만큼의 효과를 냈다. 크리스토포로와 세르지오를 따르는 무리 내부에 내분이 일어난 것이다. 크리스토포로와 세르지오는 자신들을 따르는 동료들을 의심하기 시작했으며, 동료들 역시 크리스토포로와 세르지오를 차례대로 떠나기 시작했다. 크리스토포로와 세르지오는 둘 다 로마를 주저하다가 결국 한밤중에 스테파노 3세를 찾아갔다.[69][37] 그리고 다음날 크리스토포로와 세르지오는 랑고바르드 군대에게 신병이 인도되었다. 스테파노 3세는 크리스토포로와 세르지오의 석방을 위해 협상을 벌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파울루스 아피아르타와 그의 추종자들은 데시데리우스와 정세를 논한 다음에 크리스토포로와 세르지오의 안구를 모두 적출하였다. 크리스토포로는 3일 후에 후유증을 이기지 못하여 사망했으며, 세르지오는 라테라노 궁전에 딸린 독방에 감금되었다.[69][37]

데시데리우스는 카롤루스가 개입할 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스테파노 3세로 하여금 크리스토포로와 세르지오가 카롤루스의 형제인 카를로만의 특사와 함께 자신을 시해하려는 음모를 꾸몄다는 내용의 편지를 써서 카롤루스에게 보낼 것을 강요하였다.[70][38] 아울러 스테파노 3세는 스스로 데시데리우스에게 가서 보호를 요청하였으며, 크리스토포로와 세르지오는 스테파노 3세나 데시데리우스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스스로 그들 앞에 나타났고, 스테파노 3세가 그들의 구명을 위해 노력하던 사이에 그의 지시 없이 한 무리의 장정이 나타나 크리스토포로와 세르지오를 잡아 두 눈을 뽑아버렸다고 적을 것을 강요하였다.[39]

스테파노 3세가 데시데리우스에게 성 베드로의 시신 앞에서 했던 약속을 이행해 달라고 요청했을 때, 롬바르드 왕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너를 다스리던 크리스토포루스와 세르기우스를 네 길에서 제거해 준 것에 만족하고 권리를 요구하지 마라. 게다가, 내가 너를 계속 돕지 않으면 큰 문제가 너에게 닥칠 것이다. 왜냐하면 프랑크족의 왕 카를로만은 크리스토포루스와 세르기우스의 친구이고, 로마에 와서 너를 붙잡고 싶어할 것이기 때문이다."[40]

3. 4. 끊임없는 사건과 교황의 죽음

771년 데시데리우스는 이스트리아의 주교들을 설득하여 그라도 총대주교를 배척하고 랑고바르드 왕국의 통제를 받고 있던 아퀼레이아 총대주교의 사목 아래 들어가도록 하였다.[71] 스테파노 3세는 즉시 반항적인 주교들의 성무 집행을 정지시키고, 그들에게 다시 그라도 총대주교에게 순명하지 않을 경우에는 파문에 처하겠다는 경고를 담은 서신을 써서 보냈다.[71]

크리스토포루스가 몰락한 이후, 파울루스 아피아르타는 로마 교회 내에서 계속 고위직으로 남아 있었다.[72] 772년 초, 스테파노 3세가 병상에 눕자 아피아르타는 로마의 유력한 귀족들과 고위 성직자들을 로마에서 추방하였다.[73] 1월 24일, 스테파노 3세가 선종하기 8일 전, 아피아르타는 세르지오를 목졸라 죽이도록 지시하였다.[71]

스테파노 3세는 772년 2월 1일에 선종하였으며,[74] 그의 뒤를 이어 교황 하드리아노 1세가 선출되었다.

4. 사후

교황 스테파노 3세(1850년경 성 바오로 대성당의 초상화)


중세 시대에 스테파노 3세는 고향인 시칠리아에서 성인으로 여겨졌다. 고대 시칠리아 성인 달력과 순교록 등 다양한 달력에 스테파노가 성인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그의 축일은 2월 1일로 지정되어 있다.[45] 한때 시라쿠사 시민들은 교황의 성인 지위를 공식적으로 승인하도록 교황청을 설득하려 했으나 실패했다.[45]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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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웹사이트 The Cardinals of the Holy Roman Church – Biographical Dictionary – Cardinals documented in 761 http://www2.fiu.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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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서적 Mann, pgs. 371-372
[52] 서적 DeCormenin, pg. 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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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서적 Partner, pg. 27
[55] 서적 The History of Rome in the Middle Ages
[56] 서적 Saints & Sinners: A History of the Popes 1997
[57] 서적 Mann, pgs. 376-377
[58] 서적 Mann, pgs. 377-3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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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서적 Mann, pg. 378-379
[61] 서적 Mann, pg. 381
[62] 서적 Mann, pg. 382
[63] 서적 Mann, pg. 383
[64] 서적 DeCormenin, pg. 200
[65] 서적 Mann, pgs. 383-384
[66] 서적 Mann, pg. 384
[67] 서적 Mann, pgs. 384-385
[68] 서적 Mann, pg. 385
[69] 서적 Mann, pg. 386
[70] 서적 Mann, pg. 388
[71] 서적 Mann, pg. 390
[72] 서적 Mann, pgs. 389-390
[73] 서적 Mann, pgs. 389-390
[74] 서적 Mann, pg. 3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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